
🔼겨루기 자세를 취한 이문호 대사범. 81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고수의 남다른 기세와 강인함이 느껴진다.
[세계태권도무예신문]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역 인근 한식당에서 만난 81세 이문호 대사범. 68년을 입어온 도복에는 세월이 내려앉았지만, 태권도를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젊었다. 나이는 여든하나, 마음은 아직 젊은 태권도 선수였다.
1946년 5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문호 프랑스 대사범은 올해 81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도복을 갖춰 입고 제자들을 지도한다. 틈틈이 겨루기 세미나를 열고, 품새대회에 참가해 젊은 선수들과 호흡한다. 그에게 태권도는 지나간 청춘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도 배우고, 가르치고, 함께 땀 흘리는 현재진행형의 삶이다.
이문호 대사범은 청도관에서 태권도 수련을 시작했다. 1964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뒤 정석종, 이규석 등 태권도부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선수로서 기량을 키웠다. 1960년 초반 대나무 호구를 사용할 시절 전국대회에서 밴텀급과 페더급을 호령하며 15번의 우승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겨루기계를 주름잡던 최영열, 최권열, 유기대, 유형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는 새로운 스텝과 경기 움직임을 선보이며 기존에 선 자세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겨루기의 틀에 새로운 움직임을 더하며 변화를 불어넣은 선구적인 선수로 평가받았다.
또한, 1970년대 초반 서울대학교 태권도부(권우회)에서 사범으로 함께했던 시간은 제 삶에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 태권도를 통해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져,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고 감동적입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 함께 땀 흘리며 나누었던 열정과 우정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1977년 3월, 그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이문호 대사범은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태권도를 펼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월남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비자 발급이 사실상 중단됐고, 미국행의 길이 막혔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프랑스 초청장을 받게 됐다. “편도행 비행기표만 끊었습니다.” 1977년 3월, 그는 그렇게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영어는 조금 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몰랐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시작한 그의 선택은 결국 반세기에 가까운 운명이 됐다.
그가 정착한 곳은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낭뜨(Nantes)였다. 한국인이 많지 않아 한국인 사범들이 도장을 열고 태권도를 뿌리내리기 쉽지 않은 곳이었고, 한국인 제자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낯선 땅에서 태권도를 하나씩 뿌리내렸다. 실패도 겪었지만 현지 제자들의 믿음과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한 명의 제자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땅에서 시작된 그의 도전은 결국 낭뜨의 태권도를 일구는 역사로 이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프랑스 생활은 어느덧 50년이 됐다.
이문호 대사범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가지 못하고 프랑스에 남게 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이었다고 했다. “비즈니스는 잘못합니다. 운동만 우직하게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딛고 자녀들을 장성시키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화려한 성공이나 명예를 좇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태권도 하나를 묵묵히 붙잡고 걸어온 삶, 그것이 오늘의 이문호 대사범을 만든 힘이었다.
그가 최근 고국에서 열린 국제오픈대회에 참가한 이유도 특별했다. 이미 메달은 충분했다. “메달은 다 있습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메달을 따러 온 게 아닙니다.” 그가 대회 참가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은 메달이 아니었다. “대회에 참가하니까 10년은 젊어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고맙습니다.”
그에게 대한민국의 경기장은 잊었던 젊음을 되찾는 공간이었다. 68년 도복 인생을 이어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준 고국과 후배 태권도인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컸다. “68년 도복 인생을 움직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합니다. 도복을 입고 젊은이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81세의 대사범이 경기장에 서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 태권도가 좋기 때문이다.
그의 태권도 인생에는 은퇴가 없다. 지금도 직접 겨루기 세미나를 열며 제자들과 함께 땀을 흘린다. 최근에는 80세를 기념해 세미나와 책 사인회, 제자들의 축하연을 갖기도 했다.
이문호 대사범의 세미나는 품새는 기본만 하고 겨루기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참가자들과 직접 호흡하며 기술을 지도하고 몸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본 수련생들은 뒤늦게 나이를 묻고, 80대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며, 그는 오늘도 도복을 입고 제자들과 함께 태권도의 길을 걷고 있다.
겨루기뿐만 아니라 품새에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문호 대사범은 2014년 멕시코 세계대회에서 한국 선수와 결승에서 맞붙어 불과 0.01점(백분의 1점) 차이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이듬해 2015년 세르비아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유럽챔피온에 올랐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늘 배우는 자세’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경기의 변화를 지켜보며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래서 그의 도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68년 동안 걸어온 삶의 기록이다.
이문호 대사범은 현대 태권도 경기에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현재의 경기 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무도 정신만을 고집하기에는 시대가 변했지만, 태권도의 본질적인 강인함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태권도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강하게 때려야 합니다.” 그가 특히 경계하는 것은 태권도 겨루기가 이른바 ‘발펜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태권도는 단순히 점수를 얻는 터치 개념의 기술 경쟁을 넘어, 강인함과 투지, 정확한 기술이 살아 있는 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경기장은 명확하다. “가라데처럼 챔피언들이 존중받는 경기장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수가 주인공이 되는 경기장, 공정한 룰에 의해 모두가 인정하는 경기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처음 대회에 나온 선수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 경기입니다.”선수에게 경기장의 하루는 수많은 날 중 하루일 수 있지만, 그 하루가 한 선수에게는 평생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경기장은 공정해야 하고, 선수는 존중받아야 하며, 승패의 결과 역시 모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고국을 찾은 이문호 대사범에게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대한민국 태권도의 텃밭인 한국초등학교태권도연맹의 부흥기였다. 태권도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 꿈나무들이 성장하고, 초등학교 태권도가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수십 년 동안 프랑스에서 태권도를 보급해 온 그에게 어린 선수들의 성장은 곧 모국 태권도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한국대표팀 코치를 역임하고 1977년 낯선 프랑스 땅으로 떠났던 청년은 프랑스 태권도대표팀 코치, 1988년 서울올림픽 프랑스대표팀 코치 등을 거치며 어느덧 81세의 노장이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도복을 입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선수였고, 스승이었으며, 태권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무도인이었다. 68년 도복 인생은 그렇게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6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태권도와 함께 살아온 이문호 대사범. 그의 인생에는 특별한 비법도, 화려한 성공담도 없다. 그저 태권도를 좋아했고, 운동을 우직하게 사랑했고, 낯선 땅에서도 도복을 벗지 않았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는 도복을 입는다.
그리고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가르친다. 여전히 젊은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을 달리는 81세 이문호 프랑스 대사범. 그에게 태권도는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삶이며,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은 ‘행복한 배움의 길’이다.




🔼겨루기 자세를 취한 이문호 대사범. 81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고수의 남다른 기세와 강인함이 느껴진다.
[세계태권도무예신문]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역 인근 한식당에서 만난 81세 이문호 대사범. 68년을 입어온 도복에는 세월이 내려앉았지만, 태권도를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젊었다. 나이는 여든하나, 마음은 아직 젊은 태권도 선수였다.
1946년 5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문호 프랑스 대사범은 올해 81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도복을 갖춰 입고 제자들을 지도한다. 틈틈이 겨루기 세미나를 열고, 품새대회에 참가해 젊은 선수들과 호흡한다. 그에게 태권도는 지나간 청춘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도 배우고, 가르치고, 함께 땀 흘리는 현재진행형의 삶이다.
이문호 대사범은 청도관에서 태권도 수련을 시작했다. 1964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뒤 정석종, 이규석 등 태권도부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선수로서 기량을 키웠다. 1960년 초반 대나무 호구를 사용할 시절 전국대회에서 밴텀급과 페더급을 호령하며 15번의 우승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겨루기계를 주름잡던 최영열, 최권열, 유기대, 유형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는 새로운 스텝과 경기 움직임을 선보이며 기존에 선 자세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겨루기의 틀에 새로운 움직임을 더하며 변화를 불어넣은 선구적인 선수로 평가받았다.
또한, 1970년대 초반 서울대학교 태권도부(권우회)에서 사범으로 함께했던 시간은 제 삶에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 태권도를 통해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져,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고 감동적입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 함께 땀 흘리며 나누었던 열정과 우정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1977년 3월, 그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이문호 대사범은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태권도를 펼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월남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비자 발급이 사실상 중단됐고, 미국행의 길이 막혔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프랑스 초청장을 받게 됐다. “편도행 비행기표만 끊었습니다.” 1977년 3월, 그는 그렇게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영어는 조금 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몰랐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시작한 그의 선택은 결국 반세기에 가까운 운명이 됐다.
그가 정착한 곳은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낭뜨(Nantes)였다. 한국인이 많지 않아 한국인 사범들이 도장을 열고 태권도를 뿌리내리기 쉽지 않은 곳이었고, 한국인 제자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낯선 땅에서 태권도를 하나씩 뿌리내렸다. 실패도 겪었지만 현지 제자들의 믿음과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한 명의 제자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땅에서 시작된 그의 도전은 결국 낭뜨의 태권도를 일구는 역사로 이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프랑스 생활은 어느덧 50년이 됐다.
이문호 대사범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가지 못하고 프랑스에 남게 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이었다고 했다. “비즈니스는 잘못합니다. 운동만 우직하게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딛고 자녀들을 장성시키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화려한 성공이나 명예를 좇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태권도 하나를 묵묵히 붙잡고 걸어온 삶, 그것이 오늘의 이문호 대사범을 만든 힘이었다.
그가 최근 고국에서 열린 국제오픈대회에 참가한 이유도 특별했다. 이미 메달은 충분했다. “메달은 다 있습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메달을 따러 온 게 아닙니다.” 그가 대회 참가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은 메달이 아니었다. “대회에 참가하니까 10년은 젊어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고맙습니다.”
그에게 대한민국의 경기장은 잊었던 젊음을 되찾는 공간이었다. 68년 도복 인생을 이어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준 고국과 후배 태권도인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컸다. “68년 도복 인생을 움직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합니다. 도복을 입고 젊은이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81세의 대사범이 경기장에 서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 태권도가 좋기 때문이다.
그의 태권도 인생에는 은퇴가 없다. 지금도 직접 겨루기 세미나를 열며 제자들과 함께 땀을 흘린다. 최근에는 80세를 기념해 세미나와 책 사인회, 제자들의 축하연을 갖기도 했다.
이문호 대사범의 세미나는 품새는 기본만 하고 겨루기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참가자들과 직접 호흡하며 기술을 지도하고 몸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본 수련생들은 뒤늦게 나이를 묻고, 80대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며, 그는 오늘도 도복을 입고 제자들과 함께 태권도의 길을 걷고 있다.
겨루기뿐만 아니라 품새에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문호 대사범은 2014년 멕시코 세계대회에서 한국 선수와 결승에서 맞붙어 불과 0.01점(백분의 1점) 차이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이듬해 2015년 세르비아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유럽챔피온에 올랐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늘 배우는 자세’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경기의 변화를 지켜보며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래서 그의 도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68년 동안 걸어온 삶의 기록이다.
이문호 대사범은 현대 태권도 경기에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현재의 경기 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무도 정신만을 고집하기에는 시대가 변했지만, 태권도의 본질적인 강인함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태권도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강하게 때려야 합니다.” 그가 특히 경계하는 것은 태권도 겨루기가 이른바 ‘발펜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태권도는 단순히 점수를 얻는 터치 개념의 기술 경쟁을 넘어, 강인함과 투지, 정확한 기술이 살아 있는 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경기장은 명확하다. “가라데처럼 챔피언들이 존중받는 경기장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수가 주인공이 되는 경기장, 공정한 룰에 의해 모두가 인정하는 경기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처음 대회에 나온 선수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 경기입니다.”선수에게 경기장의 하루는 수많은 날 중 하루일 수 있지만, 그 하루가 한 선수에게는 평생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경기장은 공정해야 하고, 선수는 존중받아야 하며, 승패의 결과 역시 모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고국을 찾은 이문호 대사범에게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대한민국 태권도의 텃밭인 한국초등학교태권도연맹의 부흥기였다. 태권도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 꿈나무들이 성장하고, 초등학교 태권도가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수십 년 동안 프랑스에서 태권도를 보급해 온 그에게 어린 선수들의 성장은 곧 모국 태권도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한국대표팀 코치를 역임하고 1977년 낯선 프랑스 땅으로 떠났던 청년은 프랑스 태권도대표팀 코치, 1988년 서울올림픽 프랑스대표팀 코치 등을 거치며 어느덧 81세의 노장이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도복을 입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선수였고, 스승이었으며, 태권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무도인이었다. 68년 도복 인생은 그렇게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6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태권도와 함께 살아온 이문호 대사범. 그의 인생에는 특별한 비법도, 화려한 성공담도 없다. 그저 태권도를 좋아했고, 운동을 우직하게 사랑했고, 낯선 땅에서도 도복을 벗지 않았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는 도복을 입는다.
그리고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가르친다. 여전히 젊은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을 달리는 81세 이문호 프랑스 대사범. 그에게 태권도는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삶이며,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은 ‘행복한 배움의 길’이다.